일 육사 졸업 뒤 항일연합군 공격-“임정 입장서 박정희는 적군 장교”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친일 행적’ 신문 공개
권오성 기자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소위에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 말, ‘견습 사관’으로 있을 때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두고 나눠져 다툴 정도로 여전히 살아 있는 쟁점이다. 그가 1939년 대구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에 혈서까지 써가며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한 사실이 5일 당시 신문 보도를 통해 확인되면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의 한 축은 그의 친일 여부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오는 8일 내놓을 <친일인명사전>에 담긴 그의 행적(에이(A)4 4쪽 분량)을 보면, 그는 일본인 신분으로 만주국 군관학교에 지원했다. 군관학교는 일본계와 만주계로 나눠 뽑았는데, 박 전 대통령은 일본계로 시험을 치렀다.

그는 자격미달로 두 차례나 군관학교에 떨어진 뒤 세 번째 도전으로 입학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만주국 ‘마지막 황제’ 푸이가 주는 금장시계도 받았다. 그래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고, 졸업 뒤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에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일본군 예비역 소위는 일본군이 언제든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사실상 일본 장교”며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군 소위’라는 지위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요즘 군대의 소위와 비슷한 계급으로 보아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당시 일본군 소위는 ‘고등관’으로서 판사와 비슷한 등급”이라며 “일본 육사의 조선인 입교자는 매년 1명꼴로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고 만주군관학교도 사정은 비슷했다”고 말했다.

» ‘친일인명사전’에 나타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

박 전 대통령이 44년 임관해 근무한 만주국군 보병 제8단도 사실상 일본군 히노 다케오 소장이 만든 부대다. 히노 소장은 만주국 국경경비대의 해산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사람들을 따로 모아 38년께 부대를 창설했고, 그 뒤 제8단으로 재편성됐다. 이 부대는 주로 동북항일연군 또는 소련과 전투를 벌였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부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였다. 그는 단장 부관실의 ‘을종부관’을 맡았다. 을종부관은 현재의 작전장교에 해당하는 중요 보직이다.

박한용 연구실장은 “한국 사회에서 공인의 친일 여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공적인 영역에서 인물 평가의 요소에 포함된 적이 없었다”며 “박 전 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함에 있어 그의 친일 문제도 평가의 한 축이 돼야 하고, 이럴 때 비로소 합리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 7면 기사 전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중략)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해도 자격 연령이 16살 이상 19살까지이기 때문에 23살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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血書▶◁軍官志願
 半島の若き訓導から

 二十九日治安部軍政司徵募課へ朝鮮慶尙北道聞慶西部公立小學校訓導朴正熙君(二三)より熱烈なる軍官志願の手紙が戶籍騰本、履歷書、敎練檢定合格證明書とともに"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と血書した半紙を封入、書留で送付されて?く係員を感激せしめた、同封の手紙には

 (前略)

 日系軍官募集要綱を拜讀しますと小生は凡ての條件に不適合の樣であります。甚だ僭濫にて恐懼の至と存じますけれども御無理を申しあげて是非國軍に御採用下さいませんてせうか

 (中略)

 日本人として恥ちざつだけの精神と氣魄とを以て一死御奉公の堅い決心でこざいます。しつかりやります。命のつ?く限り忠誠を盡す覺悟でこざいます。

 (中略)

 一人前の滿洲國軍人として滿洲國のため延いては祖國のため何で一身の榮達を欲しませう、滅私奉公、犬馬の忠を盡す決心でこざいます

 (後略)

 とペンで達筆に認めてあり同君の軍官志願の手紙はこれで二度目であるが軍官なるには軍籍のある者に限られてをり、軍官學校へ入れるにしても資格年齡十六歲以上十九歲であるため二十三歲では年が多過ぎるので同君には氣の毒ではあるが鄭重に謝絶することになつた=寫眞 朴君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 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 사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때 “목숨바쳐 충성” 혈서 사실로
민족문제연구소, 당시 신문 공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관에 지원하면서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냈다는 당시 신문 기사가 발견됐다.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박 전 대통령의 ‘혈서 지원’이 객관적 방증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친일인명사전>의 전면 공개(8일)를 사흘 앞둔 5일, 이 사전에 친일인사로 수록된 박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을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이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 편지 등을 보냈다고 보도한 당시 <만주신문> 기사를 함께 공개했다.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만주신문>은, 1939년 3월31일치 7면에서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게재·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논란이 정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장교가 만주군 지휘”
박지만 “아버지는 만주국 용병” 주장에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 군관 지원’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공개한 5일, 공교롭게도 이 연구소에는 법원에서 보내온 서류가 배달됐다.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51)씨가 <친일인명사전>의 배포를 막으려고 법원에 낸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 서류가 송달돼 온 것이다. 박씨는 이에 앞서 지난달 26일 “아버지에 관한 내용을 <친일인명사전>에 실어선 안 된다”며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만약 법원이 박씨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오는 8일로 예정된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는 무산될 수도 있다. 또 이미 인쇄에 들어간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자체가 중단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박씨는 게재 금지를 신청한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국의 용병이었을 뿐 일본군이 아니었고 △만주국군의 주적이 마오쩌둥의 팔로군이었던 만큼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민족문제연구소 쪽은 이날 “박 전 대통령이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사실상의 일본군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박 전 대통령의 후손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박씨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있을 때 역시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국으로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만주국군은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며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입장에서 박 전 대통령은 적국의 장교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소는 ‘만주국의 주적은 마오쩌둥의 팔로군’이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팔로군도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포함된 항일 연합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앞서 제출한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의 요지는 “1. 박정희는 만주군이었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며, 2. 만주군의 주적은 마오쩌뚱의 팔로군이었으므로 박정희는 만주국의 용병이 되어 중국공산당과 싸운 셈이며, 3.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연구소는 “1.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일본군 예비역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다.2. 팔로군도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는 연합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3. 당시의 위관급 장교는 지금과 달리 군이 절대적 우위에 있던 파시즘 국가의 고등관으로서 군수나 경찰서장도 쩔쩔맬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이는 박정희가 군관을 거듭 지원했던 이유의 하나이다.4. 엄밀히 말해서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장에서는 박정희가 적국의 장교이다.5. 박정희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대우와 존경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교직을 버리고 군관의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불가피한 상황으로 볼 수 없고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부일협력으로 이해된다”는 등의 내용으로 변론을 준비 중이다.연구소는 혈서지원 ‘만주신문’ 기사와 함께,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서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도 함께 공개했다.

by 정복자[칸] | 2009/11/06 20:13 | 정치 | 트랙백 | 덧글(0)
"일본인으로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 박정희 만주군 지원 '혈서설' 증거 공개
오마이뉴스] 2009년 11월 05일(목) 오후 01:17   가| 이메일| 프린트
[단독] 민족문제연구소,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 사본 입수

[오마이뉴스 이경태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밝히는 등 일제에 적극적인 의사를 밝히고 있다. 붉은색 원 안의 사진의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내용의 혈서를 썼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이다.

박정희 혈서설은 "1938년 5월경 학교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편지와 함께 만주군관학교에 보냈다"는 문경보통학교 동료교사 유증선의 증언(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해당 기사에 따르면, 당시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다가 연령 초과로 1차 탈락하자 포기하지 않고 지원 서류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와 채용을 간곡히 호소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1939년 군관에 재차 지원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만주신문>은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며 박 전 대통령의 편지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밝히는 등 만주군 임관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만주신문>은 이어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며 박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만주국 군관 지원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세 번째 시도 끝에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는 등 '꿈'을 이룬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 1944년 12월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일제 패망 직전까지 만주군 중위로 활동했다.


지만씨, 배포금지 가처분신청 추가... 법원결정 따라 사전발간 무산될 수도


민족문제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지난 10월 26일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이날 자료를 공개한다"며 "이와 관련한 언론 보도가 나간 후 연구소에 끊임없이 욕설·폭언을 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박지만씨는 4일 서울북부지법에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에 배포금지 사유를 추가해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법원이 지만씨 측의 결정을 받아들일 경우 인쇄가 이미 끝난 친일인명사전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게 돼 8일로 예정된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법원은 앞서 국민보고대회 전까지 심리를 끝마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어 최종 결정이 주목된다.

#이런 일을 무시하고 공헌한 일로 옛날을 덮은 것은 있을 수 없은 것이지.그대들이 늘 주둥이로 강변하는 조국과민족의 위하여 라는 이 나라는 이런 사람에 죽임을 당하면서 쟁취한 댓가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그 영령앞에 부끄렀지 않는가, 하긴 그런 점이 있다면 이 따위 나라가 되지 않았을 걸

by 정복자[칸] | 2009/11/05 20:38 | 역사 | 트랙백 | 덧글(0)
“조센징은 돌아가라”…대마도 한국 관광객 추방 동영상 논란


#이런돼도 왜왕의 방문을 허락 하는 저의 가 뭐 꼬,
자기나라 왕이니 그렇치~!
관련기사)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090922114526590h2&linkid=57&newssetid=511&from=rank
by 정복자[칸] | 2009/09/22 15:09 | 동 영상 | 트랙백 | 덧글(0)
행운을 부르는 사소한 습관들

 

행운을 부르는 사소한 습관들


[하나]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말라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이나 불행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궁지에서 벗어나

마음 편해지기 위해 즉각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물론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직면해야 하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번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면

책임을 떠넘기는 건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으로 굳어지게 된다.



[둘]진심만을 말하라



상대의 환심을 사면서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면,

상대는 늘 기분 좋게 느끼고

당신에 대해서 좋은 감정으로 갖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은

아부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또한 상대를 마음대로 하려는

얄팍한 술책이거나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아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칭찬과 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칭찬은 진심이 뒷받침된 것이다.

따라서 칭찬을 할 때

칭찬 그 자체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면

상대를 기분좋게 만들 것이다.



[셋]똑똑한 척하지 말라


똑똑한 척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바람직하지도,

운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우선 똑똑한 척 행동하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그를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똑똑하면

이로울게 없는 것이다.



[넷]당신이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선 감사하라



당신 스스로 행운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먼저 지금껏 당신이 이룬 것들을

열심히 생각해 보고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건강, 가정, 가족의 사랑,

자신의 재능과 기술에 고마워한다면,

불행에 괴로워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찾아오는

행운의 분명한 유형을 알게 되고

더 많은 행운을 만드는데

주력하게 될 것이다.


[다섯]단정하게 차려 입어라


단정하고 화려하게 차려입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유행을 잘 따르는지,

얼마나 돈이 많은지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보는 사람들을

기분좋게 만드는 것이다.

색상이나 잘 어울리는 옷차림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당신이 단정하게 매력적으로 차려입으면,

보는 사람들의 감각이

적극적으로 자극을 받아

당신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다.



[여섯]인내심을 가져라


운 좋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마감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 어느 순간에 페달을 밟지 앓고

미끄러져 내려가야 할 지도 잘 알고 있다.



[일곱]질투심을 반드시 버려라


가장 자기 파괴적인 감정은 질투심이다.

질투를 하면 스스로 고통스러울뿐 아니라,

적극적인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결국엔 자신의 운과 기회를 망치게 된다.

질투심이 많아 보이면

당신은 결코 운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운 나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행운에 배아파하고

인색하게 구는 것이다.

[여덟]마음을 편히 가져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삶이 뜻한 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는,

어쩌다 힘든 날일 뿐이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오늘 너무 너무 힘들다면

내일은 더 밝은 날이 기다릴 것이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한숨 자고 나서 한발짝 물러나 보면

쉽게 풀리기도 한다.

"행운은 스스로 운이 좋다고 믿을 때 찾아온다"

테네시 윌리엄스』 

by 정복자[칸] | 2009/09/20 22:15 | 생활 지혜 | 트랙백 | 덧글(0)
[강원] "역사 바로 세우기는 '오늘'의 몫"-이혁재 기자

화천발전소 전승비 제막
잊혀졌던 KLO의 희생 "국가와 자유를 수호"

"중공군 대포는 전나무를 깎아 칠을 한 것이다. 적진은 빈집이나 다름없다."

1951년 4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던 중부전선 '화천발전소 탈환작전본부'로 KLO(Korea Liason Office.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공작원인 오죽선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적진에 침투한 지 12일 만의 일이었다. 오죽선이 수집해온 정보는 '중공군 대포는 전나무를 깎아 만든 가짜'라는 것이었다.

6사단은 곧바로 기습공격에 나섰다. 나무 대포를 세워두고 방심하던 중공군 진지는 쑥대밭이 됐고 화천발전소는 탈환됐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전승비가 2일 화천발전소 부근에서 제막됐다.

2일 김종신 한국수력원자력 사장과 최규봉 KLO기념사업회 명예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승비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한국수력원자력 제공
◆화천발전소 탈환

화천발전소 탈환작전은 이승만 대통령의 당부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중공군 참전으로 중부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에게 "발전소만은 꼭 탈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식량은 사올 수도 있지만 전기와 물은 그럴 수 없는 귀중한 자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미 공군은 이 지역을 수차례 폭격했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수십 문의 대포가 포신을 드러냈다. 그 정도 포병 병력이면 발전소 탈환은 가망 없었다. 이때 최규봉 대장(KLO 참전동지회장)이 적진에 KLO 공작원을 침투시켰다. KLO 부대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정보 수집활동을 위해 조직했던 비정규 첩보조직. KLO부대는 전쟁 기간 수많은 비밀작전을 수행,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표적인 것이 인천상륙작전에서 팔미도의 등대를 밝혀 유엔군 상륙함대를 유도, 전세를 바꿔놓은 것. 서울과 수도권의 젖줄인 화천발전소 탈환 역시 KLO의 작품이다. 공작원인 오죽선의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물론 활동에 따르는 희생도 컸다.

화천수력발전소 모습.

◆"겨레의 명령에 복종했다"

2일 열린 전승비 제막식에는 한국수력원자력 김종신 사장, 미 8군 마이클 쿠어 부사령관, 박정기 한미친선군민협회장, 제2군단장 오정석 중장 등 국내외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해 그들의 넋을 기렸다.

김종신 사장은 "목숨 바쳐 이곳을 지켜낸 KLO 대원들의 숭고한 헌신 덕분에 오늘날 화천발전소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민족의 젖줄로 자리 잡았다"며 "잊은 채 살아온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고 말했다.

이창건 KLO기념사업회장은 "수천 명의 KLO 동지들이 전사, 행방불명 또는 나포됐으며, 남아있는 동지들도 매달 한명꼴로 운명을 달리하고 있다"며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자리가 마련돼 한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구만리 저수지 '파로호(破盧湖)'의 이름은 중공군 포로를 많이 잡았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현재까지 신원이 확인된 3000여명의 '군번 없는 용사들'(KLO부대와 유격전우회 희생자 합산숫자) 위패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봉안돼 있다.

전승비에는 무명의 학도병이 전우에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새겨져 있다. '길손이여 자유민에게 전해 다오. 우리는 겨레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곳에 누웠노라고.

 

#경기도 화전 항공대에 옛날에 KLO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by 정복자[칸] | 2009/09/03 23:42 | 군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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