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로그 방명록



'불천위'란 Family trees(족보)



 

사후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삿날이면 많은 후손과 유림으로부터 최상의 추모를 받는 이들이 있다. 불천위 인물이다.
유교 중심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불천위를 모시는 가문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최고 영광의 가문이었다. 살아서도 모든 사람의 사표가 되었던 불천위 인물은 사후에도 국가나 사회(유림), 후손들로부터 제사 등을 통해 대대손손 추앙을 받았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추앙하며 본받으려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모범을 보였던 불천위 인물들의 가르침과 덕행은 시공을 초월한다 하겠다.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이런 인물의 삶과 그 문화를 재조명하는 일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수한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불천위 인물이 가장 많은 지역이 경북이다. 경북을 중심으로 불천위 인물의 삶·사상과 함께 불천위 종가의 문화, 불천위 후손의 과거와 현재 등을 살펴볼 계획이다. 이 기획기사는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과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 이창환 대구청년유도회장 등의 도움을 받아 격주로 연재할 예정이다.
◆불천위 개념과 종류 최치원·안향·이이·김굉필 등 문묘 배향자 대표적 국불천위 불천위(不遷位) 제도는 제사문화와 직결된다. 보통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불천위는 말 그대로 사자(死者)의 신위(神位, '位牌' '神主'라고도 함)를 4대 봉사(奉祀)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뜻한다. 즉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과 학문이 높은 인물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이다. 명확히 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불천위는 일반적으로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유림에서 결정하는 향불천위(鄕不遷位=유림불천위), 문중에서 뜻을 모아 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문중불천위)로 구분한다.
불천위로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왕이나 왕족이 아닌 일반 인물이 불천위에 오르는 경우다. 국불천위가 되는 것은 왕이라도 쉽지 않았던 만큼, 양반 사대부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 인물이 죽은 후 그 학행이나 공적이 기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면, 조정에서는 임금의 명으로 시호(諡號)를 내리고 후손에게 그를 영구히 모시도록 했다.
제사 때는 나라에서 제관과 제물을 보내고, 그 후손에게 은일(隱逸)로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시호를 받은 사람은 그의 신주가 영구히 사당에 모셔지며 불천위가 되고, 그는 중시조(中始祖)가 되어 그 후손이 종가를 이루게 된다. 시호를 받았다고 모두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천위는 국가 주도로, 또는 유림의 건의에 따라 국가에서 인정하는 국불천위가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향촌의 유림이 자체적 공론을 거쳐 불천위로 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문중에서도 조상 가운데 훌륭한 인물을 불천위로 모시기도 했다. 일반인 중 국불천위로는 우선 문묘(文廟)에 배향돼 있는 인물을 꼽을 수 있다.
모두 18명으로, 신라의 설총·최치원, 고려시대 안향·정몽주, 조선시대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이다. 문묘에 배향된 불천위의 상당수가 사화(士禍)와 관련이 있다. 사화 같은 역사적 위기 속에서 그 인물의 됨됨이가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불천위 역사 조선후기 불천위 급증 질서문란 불천위는 고대 중국의 분봉제(分封制)에서 유래됐다. 진시황의 통일 이전에 중국은 각지의 제후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세습시켰다. 당시 최초로 토지를 받고 제후에 봉해진 사람을 태조로 삼아, 종묘에 모시고 불천위로 삼았다. 불천위는 후계자의 정통성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후계왕 중에서도 탁월한 공덕을 세운 사람은 불천위로 해 그 공덕을 기리게 했다. 이같은 불천위 제도는 유교문화권의 동양 각국에도 전파돼 탁월한 공덕의 왕이 불천위가 됐다. 삼국시대부터 종묘가 있었던 우리나라에도 불천위가 있었다. 예컨대 신라 종묘에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불천위로 모셔졌고, 고려 때는 건국 시조인 태조 왕건을 비롯해 개국 직후 나라의 기틀을 잡은 혜종과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현종이 불천위로 모셔졌다. 조선시대 종묘에는 유난히 불천위가 많다. 본래 불천위는 현재 왕의 5대가 되어 정전에서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겨야 할 차례가 되었을 때, 조정 신료들의 공론에 의해 결정됐다. 대체로 예조나 신료들이 불천위로 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면, 왕이 대신·백관들과 상의해 결정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불천위는 다분히 의례적인 행사로 변질되고 남발됐다. 조선시대에는 불천위가 양반 사대부 가문에도 생겨났다. 국불천위는 왕과 마찬가지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아 소수에 불과하고 향불천위도 엄격하게 결정됐으나, 후기에는 향불천위와 사불천위가 급격히 늘어나고 그 구분도 불명확하게 혼재하면서, 권위와 질서가 문란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경북에 불천위가 많은 이유 '벼슬보다는 학문 중시' 경북지역 135위로 최다…안동 3분의 1 차지 불천위는 그 행적에 따라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인물, 조선 전기 공신으로 책정된 인물, 문묘에 배향된 인물, 사화와 관련된 인물,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한 인물, 퇴계학맥에 속하는 인물 등으로 구분된다. 경북의 경우 퇴계학맥에 속하는 불천위가 가장 많은 것이 특징이다. 경북지역에 학문(유학)으로 인한 불천위가 특히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영남 사림은 장기간 권력에서 밀려나 있게 되면서 중앙정치에 의존하지 않고 향촌을 기반으로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되고, 벼슬 고하로 인물을 평가하던 기호사림과 달리 학문으로 인물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성향의 영남 선비들은 다투어 글을 읽었고, 학문을 통해 삶의 철학과 원칙을 습득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학문을 격려했으며, 아는 것과 행동을 고집스러울 만큼 일치시키려 했다. 이런 성향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더욱 강화됐을 것이다. 3대가 벼슬을 못해도 학행이 뛰어나면 선비로 대접받았고, 이런 풍토는 끊임없이 학문적·정신적 문화를 지향하게 했다. 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선비들이 이런 환경에서 특히 향불천위를 통해 독자적 세계를 확립한 것은 중앙정치에 대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런 문화가 낳은 경북지역 불천위 인물의 삶이기에 현대에도 불천위 문화가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잘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불천위 현황에 대해 아직 정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지만, 최근 경북도의 지원으로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경북지역 불천위는 135위에 이른다. 이 중 안동지역이 가장 많아 3분의 1을 차지한다. 모두가 제대로 된 불천위냐에 대한 논란은 있다.

#우리의 김녕김씨의 70-80%차지 하는 충의공파의 파조이신 호 백촌 조부님도 불천위 분이요
조선조3충신중의 한분으로 추앙 받는 백촌 김문기 조부님입니다.
270여년간 그 후손들이 역적으로 몰리다가  영조때 충의(忠毅-충성이 굳세다란 뜻)란 시호를 받고는 우리 선조이신 경순왕 후손이 병역를 면제 받은 후 우리 충의공 후손은 병역을 면제 받는 은사를 받게 한 분입니다
단종사화때 공조판서를역임 하시는 분으로 사육신에는 꼭 한번씩 언급되어 사칠신이라고도 하시지요.
이러한 큰 분의 인물은 삶이 어땋는지 궁금하네요.
예나 지금이나 모양만 다를 뿐 독같다는 느낌인데.
어찌 나는  휴우~~~~~!!!

 

글·사진 =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