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독도의용수비대` 소속 33인의 자녀들이 모여 `가족협의회`를 발족시켰다는 내용이 알려졌다. 이 단체는 지난 6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구성됐으며, 시행법안이 마련되면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 건립과 국립묘지 안장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칠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8월 중순에 발간된 `일본은 죽어도 모르는 독도 이야기 88`(2005 예나루)은 독도의용수비대를 비롯, 독도에 관한 진실 88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공동 저자 이예균과 김성호는 오랫동안 독도지킴이로 활동해오면서 독도사랑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책을 통해 독도의 과거와 현재를 보다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다. 시마네현 고시는 불법이다 먼저 일본이 내세우고 있는 독도 영유권 관련 시마네현 고시는 그들이 내세우는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지난 1905년 시마네현의 거주민이었던 어업가 나카이 이에사브로가 일본 정부를 통해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여 빌려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청원을 냈다. 일본은 1905년 1월 28일 내무대신 청의에 따라 `죽도`(竹島)를 영토로 편입한다는 내각회의에서 결정했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島根縣告示)40호가 발의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동경 131도 55분. 오끼도(隱岐島)와의 거리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다케시마`(竹島)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隱岐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 그러나 시마네현의 고시는 그 법적효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이 주장하는 무주지선점론에 따르면 독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어야 하지만 기록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에 의하면 당시 정부는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하면서 독도를 `석도`(돌섬)라는 이름으로 울릉도의 관할구역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년)에 신라의 통일 이후 우산국이 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일본의 공문서와 한국의 각종 자료를 통해서도 독도가 한국령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저자는 일본이 무주지선점론에 근거해 결정한 독도 편입은 완전 불법이며 국제법상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 영화배우 율 브리너 조부가 울릉도 망쳤다 독도 침탈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영화 `십계`와 `아나스타샤`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조부와 아버지도 울릉도와 독도를 침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이 쓴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수시로 울릉도와 독도를 침략했던 당시, 율 브리너의 조부는 울릉도 삼림채벌권을 획득해 섬에 서식하는 5백년 이상 된 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율 브리너의 아버지 역시 대한제국 말기 수출입 상사를 운영하던 중 한국의 목재벌채권을 인정받아 삼림을 수탈해갔다. 이같은 사실은 최문형 교수의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과 한국`이라는 서적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당시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한국을 1차 대상으로 지목한 뒤, 영국과 일본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이들 부자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는 우선 그들을 민간사업인으로 내세워 한국의 삼림채벌권을 부여한 뒤 점차 한국의 각종 산업을 자국의 이익에 도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대동여지도에도 독도가 표기됐다 저자는 한편 현재 통용되고 있는 대동여지도에서 독도가 빠진 이유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음을 지적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리기 위해 전국을 3번이나 답사하고 백두산을 7차례나 등정했으나 독도는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지도에서 빠졌다는 주장 등 그간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최근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이 분명하게 표기된 대동여지도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이같은 추측들이 일거에 사라졌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교수는 언론을 통해 "필사본에는 분명히 울릉도 동쪽에 `우산`이란 이름의 독도가 표기되어 있으며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밝히고 있는 주석도 첨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의 대동여지도 목판본에서 독도가 빠진 것은 지도의 판각 범위에서 독도가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이후에도 계속 드러난다.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은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문서를 직접 받아냈다. 안용복은 일본의 어업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마음대로 오가며 고기잡이하는 것을 목격하고 직접 일본 정부에 항의, 2차례에 걸쳐 두 섬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문서를 획득했다. 안용복은 평민출신의 장군으로 조선 조정이 아닌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장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안용복은 동래상인과 대마도인들만이 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던 두모포 왜관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안용복은 관리를 사칭했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당시 영의정 남구만의 건의로 귀양을 가게 됐다. 안용복의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오늘날 독도지킴이의 일등 공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 안용복 장군에 이은 독도지킴이는 홍순칠 대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다. 이들에 대한 자료 역시 미미하지만 홍순칠 대장이 남긴 수기 등 일부 기록이 그들의 활동을 전하고 있다. 홍순칠 대장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뒤 울릉도 본가로 제대했으나 일본의 독도침략을 발견한 뒤 울릉도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모아 수비대를 결성했다. 그의 조부인 홍재현 옹은 1883년 울릉도 개척의 1세대로 손자에게 독도의용수비대의 결성을 권했으며 사유 재산을 털어 그들을 도왔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지난 1953년부터 1956년까지 3년 8개월동안 일본 해상보안청 소송 함대를 수차례 격파했으며 이 소식은 일본의 NHK 등 언론 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다. 홍순칠 대장은 부족한 무기고를 보충하기 위해 실탄이 없는 가짜 대포를 만들어 배치함으로써 수시로 침략을 일삼는 일본에게 정신적인 위협과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1956년 12월 30일, 경찰에 독도 수비대를 넘긴 뒤 울릉도로 돌아왔고 이후 독도는 50여년간 경찰이 주둔하고 있다. 저자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독도의 경찰 주둔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으며 일본의 독도 관련 망언이 수시로 쏟아지는 상황에서 군대를 배치해 독도의 철통방어에 힘을 기울이자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라 자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국내 치안은 당연히 경찰이 담당해야 한다"면서 마라도에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또 해당 관계자는 "군대를 배치하게 될 경우 일본의 `영토 분쟁 지역화`라는 술수에 말려들 소지가 높다" 면서 올초 시마네현 조례가 발표된 이후 경비함정을 추가로 배치했다고 덧붙였다.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 독도는 울릉도에서 92K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인근에 작은 부속섬과 암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동도와 서도라는 2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도가 동도보다 둘레와 면적이 훨씬 크고 암초와 바위들도 많다. 독도의 정확한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을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이는 지난 2000년 경북 울릉군 의회에서 독도리(里) 신설에 관련된 조례를 채택해 공포한 것이다. 정광태의 노래 `독도는 우리 땅`에 나오는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도동 1번지`는 울릉도의 전방에 위치한 서죽도의 주소다. 책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에 얽힌 일화도 빼놓지 않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지난 80년대의 안방극장을 주름잡았던 KBS `유머1번지`의 박문영 프로듀서에 의해 만들어졌다. 대학 시절 가수 활동을 했던 박 프로듀서는 독도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 노래말을 만든 뒤 기존의 전통가요 멜로디에 붙여 `독도는 우리 땅`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노래는 82년 일본의 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한국과 일본의 감정싸움이 치닫고 있을때, KBS의 모 이사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된다. "국민의 정서를 해치는 이상한 노래"라는 것이 금지 이유였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의해 "좋은 노래"라는 칭찬을 받은 뒤 금지곡에서 해제됐으나 1년여가 지난 후 다시 방송금지처분을 받는 등 영욕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독도에 귀신이 산다 독도 주민 김성도 씨는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독도에도 귀신이 산다"고 주장하고 있다. 밤이 되면 남자의 고함소리나 여자의 웃음 소리,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독도 관광객들에게 별도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고 전한다. 김성도 씨는 자신을 포함한 주민 6명이 일명 `귀신불`이라 불리는 혼불이 배로 옮겨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성도 씨는 울릉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귀신 쫓는 방법 중의 하나인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바다에 뿌린 다음 "이거 먹고 꺼져라"고 소리친 뒤 식칼을 던졌다. 식칼의 방향이 바깥쪽으로 향하고 약 2시간이 지난 뒤 불빛들이 사라졌다는 것이 김성도 씨의 증언이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이 남긴 기록에도 귀신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수비대가 활동할 당시 통신을 담당했던 허학도 대원이 사망한 뒤 얼마 후, 허대원이 피를 흘리면서 발전실에 나타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옷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저자들은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난해하고 복잡한 기록들이 아닌 사람의 손때가 묻은 독도를 알리고 싶었으며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울릉도와의 상관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두 섬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지금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제기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구한말의 패권다툼을 이어가는 또 하나의 전쟁드라마에 다름 아니다"라면서 "독도의 과거와 현재를 집대성한 이 책을 보는 순간 일본은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영유권 논란에 일침을 놓았다. (사진 = 자료 1. 표지 2. 독도 전경 3. 장군바위와 삼형제바위 4.동도전경 5. 서도전경(출처 : 사이버독도시스템) 6. 독도의용수비대 7. 영화배우 율 브리너> [북데일리 정문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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