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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비주류의 성공 일대기 Family trees(족보)

九月, 太祖至自東北面。 是行, 太祖回至安邊, 有二鴿集于田中桑樹, 太祖射之, 一發二鴿俱落。 路邊有二人耘, 一韓忠、一金仁賛。 見之嘆曰: “善哉都領之射!” 太祖笑曰: “我已過都領矣。” 因命二人取食之。 於是二人備粟飯以進, 太祖爲之下箸。 二人遂從不去, 皆與開國功臣之列。 太祖(割)〔豁〕達濟時之量、仁厚好生之德, 出於天性, 勳庸燀赫, 愈益謙恭。 且素重儒術, 嘗以家門未有業儒者爲嫌, 令殿下就學。 殿下惟日孜孜, 讀書不倦, 太祖嘗謂曰: “成吾志者, 必汝也。” 妃康氏每聞殿下讀書聲, 嘆曰: “何不爲吾出乎!” 是年, 殿下登第, 太祖拜闕庭, 感極流涕。 及拜提學, 太祖甚喜, 令人讀官敎, 至于再三。 太祖每燕會賓客, 令殿下聯句, 輒謂曰: “我之與客懽娛, 汝力居多。” 殿下成就聖德, 雖自天性, 實由太祖勸學之勤也。
9월, 태조가 동북면으로부터 이르렀다. 이번 행차에 태조가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니, 비둘기 두 마리가 밭 한가운데의 뽕나무에 모여 있는지라, 태조가 이를 쏘니 한 번에 비둘기 두 마리가 함께 떨어졌다. 길가에서 두 사람이 김을 매고 있었으니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요, 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인데, 이를 보고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잘도 쏩니다. 도령(都領)의 활솜씨여!”

하니, 태조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벌써 도령(都領)은 지났다.”

하고는, 이내 두 사람에게 명하여 비둘기를 가져다가 먹게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조밥[粟飯]을 준비하여 바치니, 태조가 그 성의를 보아 조밥을 먹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태조를 따라가 떠나지 않고서 모두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였다. 태조의 활달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도량과 인후(仁厚)하여 생명을 아끼는 덕은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므로, 공훈(功勳)이 크게 빛났으나 더욱더 겸손하고 공손하였다. 또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했으므로 일찍이 가문(家門)에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이 없음을 불만히 여겨, 전하(殿下)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배우게 하니, 전하께서도 날마다 부지런하여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일찍이 이르기를,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하였다. 비(妃) 강씨(康氏)가 매양 전하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내가 낳은 아들이 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 해에 전하가 과거(科擧)에 급제하니, 태조가 대궐 뜰[闕庭]에 절하고는 매우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후에 제학(提學)에 임명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를 읽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다. 태조가 매양 빈객(賓客)과 연회할 적에 전하로 하여금 연귀(聯句)를 하게 하고 문득 이르기를,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

하였다. 전하께서 성덕(聖德)을 성취(成就)한 것은 비록 천성(天性)에서 출발하였지만, 실은 태조께서 학문을 권장함이 부지런하였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8장 B면
【영인본】 1책 10면

이 해가 바로 호발도를 무찌른 우왕 9년 1383년이다. 호발도를 무찌르고 자신의 근거지이기도 한 동북면을 돌며 사냥을 즐기던 도중 한충과 김인찬을 수하로 삼고 있다. 솔직히 이 두 사람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한충이나 김인찬이나 고려나 조선의 신하라기보다는 이성계 개인의 신하였을 것이다. 특히 김인찬은 이성계의 사병을 지휘하는 지위에 있었는데, 그야말로 심복을 얻은 것이라 하겠다.(우리 김녕김씨 어르신으로 후에 익화군으로 공신이 되여 양근-지금의 양평 땅-하사 받으면서 양근(평)김씨로 분성되여 나감,지금은 익화군파로 남아도 있음)

사실 이런 장면은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곳곳에 자주 나오는데, 워낙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사람들이 어지러움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기 마련이다. 일반 백성들도 그렇지만 - 그래서 혼란기에는 사람이 죽어서라기보다는 백성들이 숨어듦으로써 인구가 크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 특히 성정이 맑고 뜻이 곧고 높을수록 그런 경향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 이들을 산중에서 우연히 만나 등용했더라는 이야기는 의외로 흔하다. 한충과 김인찬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하필 고려조정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동북면에서, 시커먼 사내 둘이 어울려 밭을 갈며 살고 있었다는 점이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아마 그런 점이 있었으니 이성계도 두 사람을 서슴없이 자신의 수하로 받아들인 것일 터이고.

그 다음은 당시 - 그러니까 태조실록이 쓰여질 당시 왕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에 대한 찬양이다. 사실 태종 이방원은 그 잔인하도록 강인한 가려져서 그렇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서도 학식이 뛰어나기로 손에 꼽히는 왕이었다. 세종도 그랬지만 태종 역시 당대의 유학자로 이루어진 신하들과 유학을 이야기함에 있어서도 결코 밀리거나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역시 젊어서 일찌기 학문에 뜻을 두어 배움이 깊었기 때문인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성계가 굳이 이방원에게 학문을 배우게 한 이유다.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했으므로 일찍이 가문(家門)에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이 없음을 불만히 여겨, 전하(殿下)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배우게 하니"

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 다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일 것이다. 바로 주위에서, 나이 지긋한 분들이 항상 그 자식들에게 하는 말이니까.

말하자면 그런거다.

"나는 못 배웠지만 너는 꼭 배워라."
"못 배운 게 평생의 한이 되었으니 너라도 꼭 공부를 해서 배워라."

아다시피 이성계는 동북면 - 고려로 치면 한참 변방의 토호 출신이다. 조선시대에도 삼수갑산이라 하면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 오지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당시는 쌍성총관부가 폐지되면서 명목상으로나마 고려의 영토로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여전히 고려인들에게 이쪽은 여진인들이 사는 땅이었고, 따라서 이 지역의 토호라는 것은 오랑캐의 무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아직 민족의 분화가 뚜렷이 나타나기 전이니 여진이라 하여 배척하는 것이 조선 후기만큼 강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당시 고려의 주류들에게 동류로서 받아들여지기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공을 세우고, 토호로서 그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이 강하다 할지라도, 변방의 토호로서는 그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이끌어내기란 무리가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것은 이성계에게 있어 더할 수 없이 컴플렉스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의 아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렸던 - 이성계가 고려의 중심부로 진출하게 되었을 무렵을 가정했을 때 아무래도 이방원의 형들은 나이가 좀 많았다. - 이방원에게 희망을 걸고 당시 고려사회에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던 유학 - 특히 성리학을 배우도록 했던 것이다. 당시라면 이미 이성계의 명성에 이끌려 찾아온 젊은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을 가르치도록 하는 데는 큰 어려움도 없었을 터이고.

이성계가 말한,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느날 자기 사는 동네가 재개발되어 벼락부자가 된 졸부가, 단순히 돈이 많다고 주류로 인정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자식에게 공부를 시켜 명문대에 보내고 학자든 정치인이든 존경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로써 당당히 행세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변방의 싸움 좀 잘하고, 세력 좀 있는 별 볼 일 없는 촌놈에서 성리학적인 지식과 소양을 쌓아 학문적으로도 존경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럼으로써 자신은 물론 그 자식대에서 그의 가문이 고려의 주류로써 행세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로 그러한 뜻인 것이다. 말하자면 가문의 열망을 등에 업고 공부를 한 셈인데 - 참 이 이야기 들으면 어쩐지 공감이 갈 사람 많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성계의 반응이라는 것 역시 어디서 많이 본 것이다. 대궐의 뜰에 나아가 큰절을 하고, 제학에 제수되었다 하니 그 관교 - 4품 이상의 벼슬자리에 대한 임명장을 가지고서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읽도록 하고,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항상 이방원을 그 옆에 앉혀 손님을 맞게 했다. 그만큼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변방의 무장으로서 겪어야 했던 설움이 깊었던 때문이라, 그래서 이방원의 과거급제가 그리도 기쁘고 그리도 대단했고, 그래서 매양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면 이방원을 함께 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바로 우리네 부모님들의 모습이다. 그럴싸한 명문대학에만 합격해도 사방팔방으로 전화를 하고 자랑을 하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는.

정말이지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오는 그런 장면이랄까? 그 대단한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결국은 지금의 우리네 평범한 부모님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대야 어찌되었든, 수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서도 사람의 마음이란, 부모의 마음이란 결국 같은 것이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고 자식의 성공을 통해 또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자 하는. 그래서인가? 어쩐지 이 기사를 읽는 동안에 이성계가 그만큼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태조를 높이고자 사관이 붙인 미사여구보다 더.


辛禑十一年乙丑, 太祖從禑畋于海州。 矢人進新矢, 太祖令亂揷紙丸於積稻之上, 射之皆中, 謂左右曰: “今日射獸, 當盡中脊。” 太祖平時射獸, 必中右雁翅骨, 是日射鹿四十, 皆正中其脊, 人服其神。 世人射獸, 獸在左則射獸之右, 獸自右, 橫走出左則射獸之左。 太祖逐獸, 獸雖自右而左, 不卽射之, 必旋折其馬而鞭之, 使獸在左直走, 乃射之, 亦必中右雁翅骨。 時人皆曰: “李公射百獸, 必百中其右。” 禑嘗於行宮, 命諸武臣射, 的用黃紙爲質, 大如椀, 以銀爲小的, 棲其中, 徑纔二寸, 置五十步許。 太祖射之, 終不出銀的, 禑樂觀之, 繼之以燭, 賜太祖良馬三匹。 李豆蘭言於太祖曰: “奇才, 不可多示人。”
신우(辛禑) 11년(1384) 을축, 태조가 우왕을 따라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화살 만든 장인(匠人)이 새 화살[新矢]을 바치니, 태조가 지환(紙丸)을 쌓아 놓은 벼[稻] 위에 질서 없이 꽂아 놓게 하고 이를 쏘아 모두 맞히고는, 좌우(左右)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짐승을 쏘면 마땅히 모두 등골을 맞힐 것이다.”

하였다. 태조가 평상시에는 짐승을 쏘면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었는데, 이날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그 등골을 바로 맞히니, 사람들이 그 신묘한 기술을 탄복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짐승을 쏠 적에, 짐승의 왼쪽에 있으면 짐승의 오른쪽을 쏘아서, 짐승이 오른쪽으로부터 가로질러 달아나서 왼쪽으로 나오면, 짐승의 왼쪽을 쏘는데, 태조는 짐승을 쫓아서 짐승이 비록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나오더라도 즉시 쏘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의 말을 돌려 꺾어서 채찍질하여 짐승으로 하여금 왼쪽에서 바로 달아나게 하고서, 그제야 이를 쏘는데 또한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히니, 이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온갖 짐승을 쏘되, 반드시 쏠 때마다 그 오른쪽을 맞힌다.”

하였다. 우왕이 일찍이 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的]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小的]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 2치[寸]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태조는 이를 쏘았으나 마침내 은 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태조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이두란(李豆蘭)이 태조에게 말하였다.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9장 A면
【영인본】 1책 10면


사실 이 기사는 볼 것 없는 실록을 보더라도 시도때도 없이 나오는 이성계의 활솜씨에 대한 칭찬의 하나인데, 문득 눈길을 끄는 것이 이두란 - 이지란의 한 마디 경고다.

"세상에 드문 재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앞서 언급한 이성계가 고려의 주류들에게 있어 철저히 비주류로서 소외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과 연관된는 부분이라 하겠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하면 별별 소리들이 다 나오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비주류가 주류를 딛고 올라선다는 것, 그 사회의 비주류로서 주류에 비해 더 높은 지위와 명성을 누린다고 하는 것, 그것은 주류의 입장에서 결코 쉽게 납득하고 용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를 끌어내리려 악의적인 의도를 품게 되는데, 그만큼 비주류가 주류사회로 진입하는 것은 어렵고도 힘들다. 전체 유럽을 석권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마저 올랐던 나폴레옹조차 죽는 그 순간까지 유럽의 주류 - 귀족들에게 얼마나 코르시카의 촌놈이라 업수임을 당했던가. 나폴레옹이 죽고 그의 후광으로 나폴레옹 가문이 유럽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기는 했지만, 그가 살았을 때 그는 결코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었다. 유럽의 어느 왕가로부터도.

그만큼 비주류로서 비주류를 딛고 올라서기가 힘든데, 거기에 남다른 빼어난 재주까지 지녀보라. 그것은 그들의 열패감을 자극해서 더욱 그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래서 실제 아래의 기사와 같은 일들도 있게 되니, 이두란은 바로 그런 점을 경고한 것이다. 이성계가 자칫 현재의 위치에 취해 자신이 여전히 비주류이며 따라서 그의 성공이 그에게 밀려난 주류들의 악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잊을까 다시 한 번 주위를 환기시킨 것이다.

太祖與崔瑩情好極篤。 太祖威德漸盛, 人有欲構於禑者, 瑩怒曰: “李公爲國柱石, 若一朝緩急, 當使誰與?” 每將宴會賓客, 瑩必謂太祖曰: “我備麪饌, 公備肉饌。” 太祖曰: “諾。” 一日, 太祖爲是, 率麾下士獵, 有一獐自高嶺而走下。 地勢峻絶, 諸軍士皆不得下, 迤從山底, 回馳而集, 忽聞大哨鳴鏑聲, 自上而下, 仰視之, 乃太祖自嶺上直馳下, 勢若迅電, 去獐甚遠, 射之正中而斃。 太祖卽控馬而笑曰: “此兒之拳乎!” 瑩麾下士玄貴命, 亦在軍士中親見之, 以其狀言於瑩, 瑩嗟賞者久之。
태조는 최영(崔瑩)과 친밀한 정(情)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로 성하니, 사람들 중에서 우왕에게 무함(誣陷)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

하였다. 매양 빈객(賓客)을 연회하려 할 적엔 최영(崔瑩)이 반드시 태조에게 이르기를,

“나는 면찬(麪饌)을 준비할 것이니 공은 육찬(肉饌)을 준비하시오.”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어느날 태조는 이 일 때문에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는데, 노루 한 마리가 높은 고개에서 뛰어 내려왔으나, 지세(地勢)가 가파르고 낭떠러지인지라, 여러 군사들이 모두 내려갈 수가 없으므로, 산밑으로 비스듬히 따라 돌아서 달려가 모였는데, 갑자기 대초명적(大哨鳴鏑)의 소리가 위에서 내려옴을 듣고 위로 쳐다보니, 곧 태조가 고개 위에서 바로 달려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빠른 번개와 같았다. 노루와의 거리가 매우 먼데도 이를 쏘아 바로 맞혀서 죽였다. 태조는 곧 말고삐를 당기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주먹을 보라.”

하였다. 최영의 휘하 군사인 현귀명(玄貴命)이 또한 군사들 가운데서 있다가 친히 이를 보고, 그 사실을 최영에게 말하니, 최영이 감탄하여 칭찬하기를 한참 동안이나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9장 B면
【영인본】 1책 10면

당시 고려 조정의 군부의 최고 실력자는 최영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그에 버금가는 위치로서 이성계가 있었다. 과거 염파와 인상여가 서로 다투었어도, 자칫 그것이 나라의 이익을 해칠까 인상여가 끝내 양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최영 역시 이성계에 대한 갖는 참소며 모함에도 굳건히 이성계를 믿고 지켜주고 있다. 그야말로 자신을 잊고 나라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충절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아마 최영과 같은 이가 아니었다면 이성계도 무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비주류로서 주류를 딛고 한 사회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아무튼 당시 최영에게 이성계에 대해 말한 이들 가운데서는 당대의 권신 이인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사석에서 최영에게 "반드시 이씨가 왕이 될 것이다."라고 하여 이성계의 실력과 명망을 노골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에게 패하여 잡혀 죽게 된 최영이 당시 이인임의 말을 떠올리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고 하니, 역설적이게도 최영의 충절과 공평무사한 성품이 이성계를 살려 고려를 멸망시키는 한 이유가 되었다 하겠다. 하긴 요동정벌을 결정한 자체가 이성계에게 고려조정에 창을 돌릴 명분과 힘을 제공한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지만 말이다.


사실 신진사대부들이 변방의 일개 토호에 불과한 이성계에게 이끌린 것은 그 역시 고려사회에 있어 철저히 비주류였던 때문이었다. 수백 년 고려를 지배해 오면서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만들어내고 그로써 고려사회를 안으로부터 썩어들게 만드는 주류 권문세족에 대해, 그들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성계라고 하는 존재는, 역시 비주류로서 그러한 고려의 모순과 부조리들을 뿌리부터 뒤집어 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들에게 있어 더없이 매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비유하자면 나라를 한 번 바꿔보겠다 이념과 성향을 떠나 특정 후보를 지지하여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나섰던 몇 년 전 대선의 모습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류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뒤바꾸기 위해 특정한 인물의 비주류적인 감성과 이미지에 기대어 이념과 성향을 떠나 지지를 보내고, 직접 참여하고 행동에 나섰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당시 고려에서도 비주류로서의 이성계의 존재와 실력에 기대고자 했던 수많은 비주류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주역들이. 한 마디로 이풍李風이다. 몇 년 전 어느 나라의 대선처럼 당시 고려에도 이성계를 중심에 둔 하나의 큰 바람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성계가 손쉽게 고려사회의 주류에 진입할 수 있었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풍은 없었을 것이다. 동북면의 근거지를 유지한 채, 토호로서 고려의 주류사회로부터도 인정받고 행세할 수 있었다면 분명 이성계는 고려의 주류로서 다른 주류집단과 마찬가지로 말하고 행동하고 그러한 주류집단으로서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백 년 고착되어 온 주류집단의 기득권은 이성계와 같은 이방인을 용납하지 않았고, 그것이 이성계를 고려의 중심에서도 변방으로 떨어뜨려 놓아, 신진세력이 그를 주목하고 그에게 몰려드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새로운 피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줄 몰랐던 고려사회의 경직성이 끝내는 고려의 멸망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이성계가 느껴야 했던 비주류로서의 설움과 소외감이 바로 고려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이유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성계가 아니었더라도 당시 고려의 상황에 누군가 고려의 정치와 사회, 특히 권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존재가 필요했고, 때마침 주류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주류에 대항하여 새로운 바람을 강요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존재로서 이성계라 하는 이가 있어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숙명이랄까? 오늘의 기사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고려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고, 왜 하필 이성계가 그 중심에 있어야 했는가 하는 것을. 아마도.
출처)http://kr.blog.yahoo.com/sawoochi/1244069

#김인찬공은 우리 가문의 김녕김씨 가문의 어른이시고 후에 공신에 책봉되여 나중에 경기도 양평을 하사 받아 양근=양평김씨로 독립하고 일부는 아직도 익화공파로 김녕김씨에 남아 있지요.
우리 선조는 신라 천년을 맡아 오다가, 덜렁 고려에 헌납 하여 고려 개국공신중에 고려 태조 딸을 두째 부인으로 맞이 하여 외갓집이 되여 우리 경주김씨 중 영분공파보다 경주김씨인 우리 대안군파가 많은 출세와 북귀영화을 누려 많은 자손을 번창케 되였죠,
그리고,우리 조선개국에도 김인찬 조부님이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 회군까지 종사 하면서 개국에 또 일조 하였고,임진란에 유성룡과 함께 의주 까지 피신가는 선조를 호위하는 마부인 김응수 조부님이 난이 긑난후 호성공신으로 책봉될때 권문세족의 극렬한 반대에도 선조의 하명으로 공신에 올라갔고,분성군으로 책봉되여,분성군파로 분파되였고,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묘소가 있다고 합니다. 옛날 내가 다닌 항공대 근처에 있었는데,그곳에 있다고 언뜻들었지만 우리와 이런 인연이 있을 줄이야. 나중에 ktx에 가면 서울에 올라가면 꼭 찾아볼 생각입니다.꼭~!
그리고 해방후 북한의 김씨조선의 창업자인 김일성도 우리 대안군 후손인 집안에서 나왔죠,그리고 대산 어르신인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충정공파에서 나오셨죠, 역대의 나라를 열때 마다. 지대한 역할을 하는 집안임을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2명의 중정부장과 2명의 정보원장이 나온 집안으로 중시조의 빛나는 업적에 따라 총잡이 집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힘내시다. 최고 자리의 어리석은 한명보다, 중간에 가더라도 충효에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은 그런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지금의 현실에 비춰 보면 알수있죠.큭~!

덧글

  • Family 2008/06/22 09:20 # 답글

    .

    빛나던 동방의 별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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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을 다시 만들어 나아 갑시다.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를 뛰어 넘어 ...


    .

    [칸]의 慧眼을 다시 보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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