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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성한왕은 누구인가 Family trees(족보)

신라 성한왕은 누구인가?



 최근 KBS 한국방송공사를 통해 신라는 흉노의 후예이며 그 유력한 근거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중인 무무왕릉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형성과정은 역사적측면은 물론이고 인류학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이 모두 고려되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방송 공사측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나치게 편협적일 뿐더러, 신라의 역사를 고립적으로 파악한 면이 있다. 다만 본글에서는  역사적 측면에 제한하여 살펴 보았음을 밝힌다.

 문무왕릉 비문에 관한 해석


 문무왕릉비는 1790년 농부에 의해 갑자기 발견된 비문으로 내용이 확실치 않거나 탈락된 글자가 많아 완전한 해석이 매우 어렵다고한다.
 
그럼 방송국측이나 일부 흉노신라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유력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문무대왕릉의 비문 내용을 살펴보자

 문무왕릉의 비문은 앞뒷면 각각 28행으로 총 56행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가장 문제가 되는 앞면 5행은 다음과 같다. 

.....(추론:우리 신라의)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君靈源自?繼昌基於火官之后峻構方隆由是克
군령원자계창기어화관지후준구방륭유시극  
 


후(?侯)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枝載生英異( )侯祭天之胤傳七葉以지재생영이( )후제천지윤전칠엽이

라고 나와있다. 결정적인 한글자가 마모되어 '투후(透侯)'라는 단어는 역사의 전개나 문맥의 흐름상 유추해 낼 수 밖에 없다.


 이어 나오는 6행에
15대조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신라?)를 개창하였다... 

그런데 문무왕릉 비문을 보면 문무왕을 기리고 찬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고구려 백제가 자주 침략하였기 때문에 당고종의 뜻을 받들어 두 나라를 정벌한 일은 정당하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만약 문무왕이 '투후'를 내세우고, 그것을 통해 전성기 시절(기원전 200∼140)약 60년간 한나라에게 조공을 받던 강대한 나라 흉노의 후손임을 밝혀 당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서고자 하였다면, 비문의 내용에 자존감을 내세우는 내용이 보다 분명하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비문글자가 상당부분 훼손되어, 그 내용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으로 봤을 때 친당사대주의적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본 블로그 문무왕릉비 전문 참조) 그런 비문에서 과연 문무왕은 자신을 흉노의 후예로써 '투후'라고 표현했을까?  개인적으로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중국 산동성에는 한왕조로부터 투국을 분봉받은 김일제의 투국과 금성이 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김씨 중에서 중국왕조로부터 최초로 봉토를 인정받은 사람이 김일제이며 투국이다. 신라 김씨 왕실이 투후를 내세우려 하였다면, 오히려 중국식 봉건제에 편입되기 위해서거나 편입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조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성한왕은 미추왕일 것이다.


 한국방송공사측은 문무왕릉비에 나와있는 성한왕에 대해 '김알지'라는 추측을 하였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단 한줄도 언급되어 있지만, 문무왕릉비나 그 동생 김인문의 비에는 언급되어 있는 성한왕은 누구인가?
 개인적으로 성한왕은 미추왕일 것이라고 보고있다.
 그럼 우선 ( )侯祭天之胤傳七葉以(?"제천지윤전칠대의)라는 문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의 후예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7대에 전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공동으로 미추왕이 김알지의 7대손이라 전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반면 김일제의 7대손이 김알지라는 주장은 어떻게 해서 김알지가 7대손이 되는지 그 근거가 불분명하다.

 또 문무왕의 15대조가 성한왕이라고 나와있다. 물론 조상으로 생각하면 문무왕의15대조는 김알지의 아들 세한이 된다.

1) 김알지 - 2)세한-3)아도-4)수류-5)욱보-6)구도-7)미추(왕)- 8)말구(구도의 손자) -9)(내물(왕),실성(왕))-10)눌지(왕)-11)자비(왕)-12)<< 소지(왕;절손됨),지증왕(내물왕의 증손)>>-13)법흥왕-14)진흥왕-15)진지왕-16)진평왕(진흥왕태자 동륜의 아들)-(선덕여왕, 진덕여왕),무열왕(진지왕의 손자로 진평왕과 같은 학렬)-17)문무왕
                  
  하지만 세한에 대해서는 이름만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 그에대한 어떠한 설화나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만약 세한을 시조로 추앙하였다면, 신화를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소흘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면 미추왕은 비록 문무왕의 15대조 조상은 아니지만, 김씨 왕대로 보면 자신을 포함하여15대로 올라가는 왕이 된다.

 미추왕 -(석씨왕계 제외)-내물왕-실성왕-눌지왕-자비왕-소지왕-지증왕-법흥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경주 대릉원내 있는 미추왕릉
섬국유사에 의하면 왕릉을 시조당이라 일컫는 것은 김씨가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라 하였다.
즉 미추왕릉에 있는 사당을 시조당으로 칭한 것이다.

또 미추왕은 후대 신격화되어 호국신으로 추앙되었으며, 제사차례를 5릉 위에 두어 대묘라고 격상하였다.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장식보검 (국립경주발물관 소장 보물 635호)·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김씨가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이 미추왕에서 비롯되었다.'고 나왔으며, 삼국유사 미추왕편에서도 후대 여러왕들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았다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나와있다.
 결국 성한왕을 미추왕으로 본다면, 역사기록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미추왕을 성한왕으로 표기하였을까란 의문이 남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라는 초기 중국식 왕호제가 아니라, 소지왕까지 이름으로 왕호를 삼았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이후부터 중국식 왕호제가 정착되고,  후손의 입장에서 시조로 모시는 조상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를수가 없었기 때문에 '미추왕'을 '성한왕'으로 추증하여 불렀을 것이다.

 더욱이 5행 서두에 신라 김씨왕실의 근본은(화관지후)에서부터 나온것이 씌여있다.  화관지후는 화로를 담당하고 관리하는 직책으로, 문무왕릉 비문의 화관지후는 중국의 요임금을 뜻한다. 그러나  화로(火爐)를 이용해 청동기를 생산하고 토기를 제작하던 기술은 동이족에서 시작되었으며, 요임금역시 중국인이 그들의 조상으로 왜곡하였지만 동이족 출신이었다.

 또한 흉노의 후예 투후라고 밝혔다면, 화관지후의 집안임을 자처했을리 없다.  문무왕릉비는 흉노보다 더 오래되고 더 근원적인 동이족의 후손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당시 정서상 자주성에 의한  발호가 아니라, 중국과 역사적 공동체로서 부족함이 없다는 뜻에서 '투후'라는 표현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의 정립, 단편적인 내용의 조합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것

 우리나라 고대문화는, 신라가 삼국통일하기 이전까지 중국문화보다는 오히려 북방문화요소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의 거대한 문명을 열면, 그 속에는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나오기 마련이다.
 
 신라역시 다양한 문화요소속에  흉노계열의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적석목곽묘(*돌무지 나무덧널무덤,  지상에 설치한 목곽 위에 사람 머리 크기의 강 자갈을 덮고 다시 그 위에 흙을 입혀 다진 무덤)라는 무덤양식이나 금관등의 출토및 일부 언어의 유사성, 그리고 백제나 고구려보다 신라에서 근친혼이 심했다는 사실등이 그것을 뒷받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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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300호 경북 경산 임당동고분군(慶山林堂洞古墳群)
『삼국사기』에 ‘파사왕 23(서기103년)년 압독국왕이 신라에 항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덤의 형식은 널무넘(목관묘), 독무덤(몽관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을 비롯하여 다양하게 나타난다
. 따라서 흉노문화가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기 보다는 신라문화속에 흉노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문화에 있어 왜 5~6세기에 흉노문화가 강하게 반영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당시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최전성기였다. 즉 고구려의 팽창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영토적으로 응측된 상황이  흉노라는 특정문화요소를 강하게 나타나게 하는시대적 배경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문화는 어떤 단독의 문화가 고립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동북아의 광대한 문화가 응축되고 융화되어 나타난 종합문화였다. 따라서 그 문화속에 흉노문화가 강하게 반영된 때가 있다고 해서 신라역사 전체를 흉노문화의 전개과정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우리 김녕김씨 직계조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출처)http://kr.blog.yahoo.com/shim4ro/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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